대학시절 같은 동아리 선후배 사이였던 K를 우연히 만난 곳은 인천공항 면세점 이었다.
크리스마스 연휴를 맞아 K는 싱가포르로 가는 길이었고, 나는 유럽으로 휴가를 가는 길이었다.
스무살에 만나 10년넘게 연락이 끊어졌다가 서른이 넘어 다시 인연을 잇게 될 확률은 얼마나 될까?
그것도 해외로 가는 길에 말이다. 말도 안되는 소설같은 일이지만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10년의 세월이 무색하게 하나도 변하지 않은 그녀는 여전히 발랄하고 생기가 넘쳤다.
출국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반갑게 인사하고 연락처만 교환하고 우리는 헤어져야 했다.
휴가 끝나고 한국에 돌아오면 다시 만나자는 약속은 오랫동안 지켜지지 않았다.
각자의 삶이 바빴기 때문이다. 그렇게 데면데면하게 가끔 연락처만 주고받다가
K가 내가 사는 동네로 이직하게 되면서 우리는 같은 동네 주민이 되었고, 우리는 다시 급속도로 친해졌다.
10년을 떨어뜨려놔도 기어이 다시 닿고야 마는 그런 인연이 있는 모양이다. K와 나처럼 말이다.
어느날 K 에게 갑자기 연락이 왔다.
'선배 나 남자친구랑 헤어졌어요. 술사주세요'
실연한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그녀의 '전' 남자친구를 비난했다. 당연하지만 나는 그녀 편이었다.
주량이 소주 2잔이라는 k는 이날 소주를 반병이나 마셨지만 멀쩡한 정신이었다.
실연의 상처에 가장 좋은 치유약은 여행이라며 우리는 주말에 당장 당일치기 여행을 떠나기로 즉석에서 마음을 모았다.
그날이 목요일 저녁이었으니 정말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어디를 가야하나 고민하다가 머리속에 떠오른 또 다른 한사람 I 선배였다.
대학시절 내 기억속 I 선배는 학교 다닐때 꽤나 열심히 공부하고 성실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선배가 어머니의 고향 '영광' 에 혼자 내려가서 전공인 기계공학과 전혀 상관없는
장어 양식장을 차렸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때는 아연실색했었다.
뭔가 사정이 있겠지 싶어서 자세한 내용을 묻지는 못했는데, 그날 갑자기 십여년동안 만나지 못했던 I선배가 보고싶어졌다.
'우리가 I선배 보고싶은 만큼, I 선배도 우리 보고싶을거야!'
우리는 이렇게 의기 투합했고, 당사자인 I선배의 의견은 묻지도 않고 선배네 집에서 1박을 하기로
우리끼리 마음대로 정하고 당사자에게는 우리의 결정을 통보 했다.
그렇게 뜬금없고 급작스러운 주말 여행은 K의 실연을 핑계로 삼아 이루어 졌다.
회사에 출글하는 시간보다 더 이른 시간인 새벽 5시에 일어나서 K를 만나 함께 전남 영광으로 출발했다.
4시간 넘게 운전했지만 우리는 피곤한줄을 몰랐고, 들뜨고 흥분된 마음은 한껏 부풀어 있었다.
출발하기전에 I선배에게 '지금 서울에서 출발합니다' 문자를 보냈다.
새벽시간이라 당연히 자고 있을거라는 우리의 예상은 빗나가고 곧바로 조심히 내려오라는 답문자가 날아왔다.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I선배도 십년만에 학교 후배들을 만날 생각에 설래어 새벽잠을 설쳤다고 한다.
오랜만에 만났지만, 10년이라는 세월이 무색하게 바로 어제 만났던 사람인것처럼 우리는 편안했다.
점심으로 굴비정식을 먹고 커피가게로 자리를 옮겼다. 봇물터진 우리의 수다는 끝나지가 않았고,
목이 쉴정도로 우리는 서로에게 그리움을 쏟아냈다.
초등학교 친구들을 만나면 마음이 초등학교 시절로 돌아가고, 대학교 친구들을 만나면 다시 대학 시절로 돌아간다.
나이가 들 수록 되새기는건 추억이고, 남는것은 그 시절을 같이 나눈 사람들인것 같다.
그날 우리는 다시 스무살적 청량한 바람이 불었던 그 시절로 돌아갔다. 그래서 너무나 행복하고 즐거웠다.
대학을 졸업하고, 준비하던 시험에서 떨어진 I선배는 오랜 방황끝에 양식업을 배웠다고 했다.
말하지 않아도 그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이 갔다. 나는 들어주는것 말고는 할 수 있는것이 없었다.
본래의 목표는 선배의 집에서 하루 숙박하고 밤새도록 밀린 회포를 풀 작정이었지만,
당일 급하게 양식장 출하 계획이 잡히는 바람에 우리는 다음을 기약하고 헤어져야만 했다.
4시간을 숨도 쉬지않고 목이 쉬도록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10년동안 밀린 이야기는 끝이 나지 않았다.
우리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아쉬움으로 서로의 손을 놓지를 못했다.
4시간반을 운전하고 내려와서 선배 얼굴 잠깐 보고 다시 4시간을 운전하고 올라가야 하는길.
영광에서 아름다운 노을이 내리기로 유명한 백수 해안도로에서 넘어가는 해를 구경하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애타는 우리 마음처럼 그날의 노을은 유난히 붉고 아름다웠다.
'내려오길 잘했다 그치?'
아쉽지만 힘들지는 않았다. 살다보니 깨닫게 되는 한가지는 '다음에 보자' 하는 영혼없는 약속은
영원히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보고싶은 사람이 있다면 없는 시간을 쪼개서 일단 약속부터 잡고 볼 일이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사람때문에 상처받았던 마음을 사람으로 치유받고 돌아가는 여행길.
긴 삶을 살아온 것은 아니지만, 돌아보면 내가 살아온 삶도 이번 여행과 다르지 않는것 같다.
나의 끝없는 여행은 언제나 사람을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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