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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여행] 광성보 :: 손돌의 한숨, 손돌의 추위

Trable (여행 기록장)/국내여행

by 바람국화 2015. 7. 15.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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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에는 5개의 진, 7개의 보, 53개 돈대가 있다. 시간관계상 모두를 둘러 볼 수는 없으므로 '덕진진' 과 '광성보' 를 하나씩 둘러보기로 했다.

덕진진에서 자동차로 5분정도 거리를 올라가면 광성보가 나온다.

진,보에는 대체로 150여명의 병력이 유지 되고 있었으며 진은 요즘 군대의 대대, 보는 요즘 군대의 중대 규모에 해당한다.

진무사는 첨사(종2품) , 보무사는 만화(종4품) 의 무사가 파견되었다. 사실 '진'과 '보' 는 지휘하는 장군의 계급이 차이외에는 실제 크기만 놓고 봤을때봤을때는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두군데 모두 들러본 느낌으로는 광성보가 좀더 크다고 느꼈는데, 간척사업으로 인해 바다를 매입하여 땅이 넓어져서 덕진진보다 광성보가 크게 느껴졌다.

 

 

 

 

 

 

 

 

 

 

[광성보]

 

조선 1658년 (효종9년) 에 설치한 강화도 해안수비 진지의 하나이다. 1679년 (숙종 5년)에 강화도의 국방시설을 확장할 때 화도돈대, 오두돈대, 광성돈대를 함께 축조하여 이에 소속시켰다. 신미양요 때 (1871년) 미국 군대와 사투를 벌인 격전의 현장으로서 이때 전사한 어재연 장군을 기리는 전적비와 350여 명의 순국 영령들을 기리기 위한 신미순의총이 있다.

 

 

 

 

 

 

 

 

 

[쌍충비]

 

1871년 신미양요 때 광성보전투에서 순절한 장군 어재연 (1823-1871) 외 59명의 순절비이다. 1기는 <광성파수순절비>로 비의 규모는 높이 168cm, 너비62cm, 두께 25cm 의 양면비로 1873년에 건립한 것이다. 다른 1기는 어재연과 어재순 (1826-1871) 순절비인데 폭이 높이 177cm, 너비 58cm, 두께 26.5cm 의 양면비로 역시 1873년에 건립되었다.

고종때부터 제사를 지내왔으며, 1970년부터는 어재연의 후손들이 제사를 올려 충절의 유업을 추모하고 있다.

 

 

 

 

 

 

 

 

[신미 순의총]

 

고정8년 (1871, 신미양요) 광성보 일대에서 미해군과 격전을 벌이다 전사한 무명 용사들의 무덤이다. 전사자들 중에서 어재연, 어재순 형제는 충북 음성군 대소면 성본리에 안장하고, 남은 군졸 51인은 신원을 알수 없어 7기의 분묘에 합장하여 이곳에 안장하였다.

광성보 전투에서 조선군은 최후의 한명까지도 포로가 되기를 거부하며 비겁하게 물러서지 않았으니, 외세의 침략에 대항하여 나라를 지키려 했던 우리 민족의 호국 정신을 잘 보여주는 곳이다.

 

 

 

 

 

 

 

 

손돌목 돈대 가는길.. 공원같은 느낌의 유적지라서 산책하는 마음으로 둘러봤다. 여름이 한창인 신록의 푸르름이 눈과 마음을 맑게 해준다. 여름이 진하게 묻어나는 날씨. 서울을 조금만 벗어나도 이렇게 신선한 공기가 반갑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강화도 방문은 이번이 두번째 이다. 고등학교때 수학여행으로 왔던 기억이 있다. 그때가 벌써 1999년 이니 벌써 16년 이나 지났는데, 변한듯 변하지 않은 강화도의 모습이 참 신기하다. 지금이야 다시 이렇게 찾아와서 하나하나 둘러보니 교과서속에 역사를 마주한듯 흥미로웠지만, 고등학생 시절 수학여행 여행지로 찾은 강화도는 나에게 관심이 없는 곳이라서 대충 둘러보느라 남아있는 기억이 별로 없다. 뭐든지 관심을 가지고 마음에 두어야 눈이 가는 법이다.

 

 

 

 

 

 

 

 

 

 

강화도는 한강 입구에 있는 섬이다. 그러나 여느 섬과는 달리 육지와 섬 사이를 흐르는 물결이 빠르고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심해서 술련되지 않은 뱃사공은 물살을 함부로 건너지 못했다. 후금이 쳐들어 왔을때 임금이 서둘러 강화도로 피난길을 나섰을때 손돌이 길안내를 맡았다. 그러나 강화도로 가는 뱃길은 험했다. 거센 물살과 뒤집힐것 같은 배는 임금을 불안하게 만들었지만, 손돌은 태연하게 노를 저여 점점 더 험한 물살의 가운데로 배를 향해갔다. 임금은 이 뱃사공이 나를 죽이기 위해 이곳으로 모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래서 손돌을 죽이라 명령했다.

 

손돌은 죽기전에 말했다. '제가 띄우는 바가지가 흘러가는 곳으로 배를 몰고 가십시오 그러면 안전하게 강화도에 도착할 것입니다'

손돌은 죽었고 바가지가 흘러가는 곳을 따라가던 배는 강화도에 도착했다. 임금이 말했다. "내가 손돌을 의심하였구나 나의 잘못이다. 손돌의 시신을 잘 거두어 후하게 장사를 지내도록 하라." 그뒤로 사람들은 이 뱃길을 손돌의 목을 벤 곳이라 하여 손돌목이라 부른다.

손돌이 죽은 음력 10월 20일에는 큰 바람이 분다고 한다. 이를 손돌의 한숨, 손돌바람 손돌추위라 한다.

 

 

 

 

 

 

 

 

 

[손돌목 돈대]

 

조선 숙종5년 (1679)에 축조된 돈대로 원래 돈대 중앙에 3칸의 무기고가 있었고 포좌 3개가 있었다. 돈대 넓이는 778 ㎡ 에 성곽 길이가 108m 이다.

고종 8년 (1871) 신미양요기간동안 미국 해군과 가장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던 현장이다.

미군 측에서는 맥키 (Hugh Mckee) 해군 중위와 두명의 수병이 전사한 반면, 조선측에서는 어재연 장군을 비롯한 대부분의 조선군이 전사하였다.

함락 직후 미군들은 광성보 전역에 설치되어 있던 군사시설들을 모조리 불태우거나 파괴하고, 각종 군기와 대포들을 전리품으로 노획한 다음 6월 12일 오전 소속함정을 타고 작약도의 기함 정박지로 철수하였다.

 

 

 

 

 

 

 

 

 

[광성포대]

 

조선후기 강화도 해안수비를 위해 설치된 방어시설 가운데 하나이다. 국방 강화책으로 숙종은 강화도내에 내성, 외성, 12진보, 53돈대 등을 축조하여 요새화를 이루었으나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거치면서 화력을 증가시키는 일이 시급한 과제로 등장함에 따라 고종 11년 (1874년) 용진진, 광성진, 덕진진, 초지진에 포대를 설치하였다.

광성포대는 손돌목돈대 주변 3곳에 설치되었으며 각각 9좌, 4좌, 3좌의 포좌를 갖추고 있었으며 이중 가장 규모가 큰 중앙포대는 길이 80m, 포좌의 크기 약 6m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1875년 운양호사건을 계기로 외세에 문호를 개항함에 따라 파괴되었던 것을 2004년 발굴조사를 실시 유적이 확인되어 복원정비를 하였다.

 

 

 

 

 

 

 

 

 

 

안타깝게도 용두돈대는 복원 공사중이라서 출입이 제한되어 있어서 발길을 돌려야 했다.

멀리서 바라보는것으로 만족.

 

 

 

 

 

 

 

 

 

 

※ 광성보 입장료 : 1,100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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